아시안컵 관전기) 더럽게 못했다
‘더럽게 못했다.’
한마디로 표현한 관전 총평이다. 목사가 아니라 칼럼니스트로 하는 말이다. 물론 목사가 한 말이라 해도 괜찮다. 사람들은 목사가 어떻게 그런 쌍말을 하느냐고 비난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 비난을 달게 받겠다. 그 사람이 진정 거룩한 사람이라면 그 이상의 쓴소리도 거부하지 않겠다. 그러나 목사는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나?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하면 안 되나? 목사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 솔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는데 겉으로는 거룩한 체하는 것이 적지 않는 목사들의 모습이 아닐까? 많은 목사들이 바리새인이 되었고 서기관이 되어 있다. 위선은 가장 나쁘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이 가차없이 욕설을 하셨다. 심지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까지 하셨다. 이는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최고로 모욕적이고 최고의 치욕적인 욕설이었다. 욕설을 입에 달고 있으면 안 되겠지만 정말 욕먹을 짓을 했을 때는 거룩한 체할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욕설을 해주는 것이 정직이다. 솔직이다. 목사에게는 정직이 요구된다.
밤늦게 밤잠을 설쳐가면서 응원하며 기대했는데 무참하게 기대를 붕괴시킨 우리 선수들을 보면서 나는 이 욕설을 해주고 싶다. “더럽게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이 아닌가.

4강에서 요르단전은 그야말로 졸전이었다. 제대로 공격다운 공격을 하지 못했다. 슈팅 수 8-17, 유효 슈팅 0-7이 그것을 말해준다. 90분 내내 골문 안으로 슈팅을 한번도 못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의미이다. 세계 23위의 팀이 87위에 지나지 않는 팀에게 2:0으로 패했다는 것은 충격을 넘어 치욕이다. 태권도 선수가 유치원 아이에게 얻어맞아 KO패 당한 꼴이 아닌가. 축구가 아무리 공이 둥글다 해도, 세상이 아무리 요상하다 해도 이건 해도 너무 하지 않는가. 하기야 이런 기현상이 일어나야 살맛이 나긴 하다.

이번 패인은 두 번의 연장 혈전을 치르면서 체력이 바닥이 났다고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정신력의 문제이다. 실실 웃으면서 장난치듯 연습할 때 이미 알아봤다. 2:0의 패배는 정신무장 해제의 결과이다. 정신무장 해제를 ‘방심’이라 한다. 우리 선수들은 4강 전에서 완전히 방심하고 말았다. 예선전에서 요르단에게 이미 혼줄이 났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87위라는 숫자를 너무 얕본 것인가. 방심은 얕보는 데서 슬금슬금 기어나온다. 무엇을 하든 내가 너보다 낫다는 교만이 방심을 가져온다. 방심하면 패배는 이미 예약된 것이다. 노쇼(예약을 펑크내는 것)가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 팀이 그랬다. 체력 소모와 김민재의 부재가 큰 데미지였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원인은 뭐니해도 방심이다.

방심은 비단 축구 선수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에 있다. 많은 국민들이 방심에 빠져 있다. 우리 국민들은 나라의 장래에 대해 너무 방심하는 것 같다. 너무 낙관하는 게 아닌가 싶다. 특히 국방에 대해 그렇다. 주사파 정치인과 주사파 간첩들이 온 나라에서 난리를 쳐도 위기의식이 전혀 없다. 우리나라는 엄연히 분단국가다. 북쪽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이리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남쪽의 무지한 양들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경제력이 50배 이상이고 군사력이 7배가 강하다(한국5이, 북한38위)고 방심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북한에는 한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핵무기와 굶주림의 욕망이 그것이다. 월남이나 아프가니스탄이 왜 망했는가. 경제력이 떨어져서 인가. 군사력이 약해서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월남은 당시 경제력이 월맹보다 월등했고 세계 5위 군사력은 군화도 없이 소총 한 자루 들고, 게다가 군인의 숫자도 적은 월맹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망했다. 방심의 결과였다. 아프가니스탄도 탈레반이 따라올 수 없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의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에 탈레반은 소수의 반란군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는 어땠는가? 이 나라들의 패망은 모두 방심의 문제였다. 정신력이 문제였다. 너무 태평했고 위기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당했다.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안전히 멸망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요르단의 일격에 무너졌다. 유효슈팅 하나 없이 지루하게, 못하던 전반전은 골키퍼 조현우의 맹활약으로 무사히 넘겼지만 후반전에 와서 방심의 결실이 알알이 맺히기 시작했다. 결실도 아주 알찼다. 후반 들어서자마자 요르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8분에 박용우가 수비진에게 보낸 공을 알타마리가 가로채 수비가 엉성한 빈공간으로 찔러주자 잽싸게 달려온 알나이마트가 그대로 골대 안으로 공을 집어넣었다. 후반 21분, 황인범이 놓친 공을 잡은 알타마이가 치고 들어올 때 한국 수비는 추풍낙엽이었다. 김민재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골은 이미 예약되어 있었다. 2:0은 방심한 자의 당연한 열매이다.

요르단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비록 FIFA랭킹 87위라 하지만 발이 빠르고 한 방이 있는 팀이다. 에선 전에도 2:2 비길 정도로 요주의 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23위라는 순위를 너무 믿었던 것일까? 요르단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었다. 방심의 극치를 이루었다. 무대책, 무전략이었다. 탁월한 유럽파 몇 선수에게 의지하는 축구였다.
이 책임의 90%는 감독에게 있다. 클린스만 감독은 뛰어난 선수였지만 감독으로서는 빵점이었다. 전략도 연구하지 않았고, 우리나라에 머물기보다 자기 고향에서 더 많이 머물렀다. 성실하지 못했고. 승리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도 없었다. 요르단에게 처참하게 패했음에도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웃고 있는 저 모습은 우리나라 주사파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양산 아방궁에 앉아 거덜 낸 국고를 더 거덜내며 막대한 국비를 낭비하면서 67명의 경호원에 둘러싸여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보고 빙그레 미소 짓는 문재인을 보는 듯했다.

김민재가 결장했을 때를 대비하여 전략을 짜야 했고, 아시안컵에 임하기 전에 많이 지적 받은 약한 수비를 보강했어야 했다. 수비가 약한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쳬력소모 선수 혹은 부상선수를 대체하도록 교체선수를 충분히 훈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거액의 연봉(29억)을 챙긴 저 배짱은 도대체 누구의 배짱인가. 전과 4범에다 형수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온갖 비리에 연루된 것도 모자라 거짓말은 전매특허처럼 해대는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함부로 날뛰는 우리나라의 어떤 정치인의 두둑한 배짱을 닮은 것인가. 그렇게 해도 지지하고 얼마나 꿀을 먹었는지 도무지 입을 열지 못하는 도덕성과 윤리성과 판단력이 이미 마약 먹은 듯 마비된 우리나라 국민성을 벌써 알아차린 것인가. 그럼에도 사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저 가뭄 든 양심은 누구의 양심을 닮았는가.

클린스만 감독은 대한민국에 발을 딛는 순간 곧바로 가족이 기다리는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나라에 더 머물 필요가 없다.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양심 있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책임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번 실패의 최대 원인자가 바로 그이니까 말이다. ‘황금세대’ 라는 최고의 전력을 갖고도 아시안컵에서도 우승하지 못한 무능력한 감독을 우리는 수용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사람만 좋다고 감독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분에 맞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깡다구만 있다고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자질과 인품이 있어야 한다. 쥐나 개나 다 감독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옥석을 잘 골라야 한다. 이번 아시안컵의 실패는 옥석을 가리지 못한 축구협회의 잘못이 크다. 옥석을 가릴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축구협회장이 되어야 한다. 돈 있다고 아무나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옥석을 가릴 줄 아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요르단에게 처참하고 허무하게 패배한 우리나라 축구팀처럼 되지 않으려면 총선에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헛되고 허무한 시간이었다. 괜히 아까운 잠 잘 시간만 날려버렸다. 지도자 한 사람의 무능력이 나라를, 단체를, 기관을, 팀을 얼마나 쉽게 망칠 수 있는가를 실감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아야겠다.
내키지 않지만 감독을 잘못 만나 기력만 낭비한 선수들에게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