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을 읽고
<우신예찬>을 읽었다. 처음이다. 아주 유명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동안 한번도 읽지 못했다. 책을 적게 읽은 것은 아니지만 당장 필요한 책이 아니라서 뒤로 미루다가 지금까지 읽지 못한 것이다. 미루면 결국 이렇게 된다.
유준형 목사님의 소개로 박노진 목사님이 인도하는 고전문학 독서회에 참가한 것은 소홀히 했던 인문 고전을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마운 일이다. 유 목사님과 박 목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신예찬>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계사에서 공부를 했고 시험문제에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름은 익히 알면서도 실제로 읽지는 않는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나이 60 넘어 이제라도 에라스무스의 명작, 그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39쇄를 인쇄할만큼 히트를 쳤던 베스트셀러를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신예찬>은 한마디로 말하면 우신을 내세워 그 당시 현자요 위선자였던 교황과 가톨릭 사제, 철학자를 비꼬는 풍자문학이다. 철학서라 할 수도 있고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소설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우신이다. 愚神은 어리석음의 여신이다. 그리스어로 어리석음은 ‘모리아’이다. 이삭이 야곱을 제물로 드린 모리아 산이 생각난다. 여기의 ‘모리아’는 ‘여호와께서 보이신 곳’이란 의미이지만 에라스무스가 말한 그리스어 ‘모리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왠 일일까? 아무리 여호와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이삭이 자기의 아들, 그것도 100세에 낳은 자기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행위가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에라스무스의 우신은 이러한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 한다. 어리석어도 보통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에라스무스는 탁월한 사상가요 인문학자요 신학자다. 사제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사제가 되려고 수도원에서 수학하여 사제의 서품을 받았지만 사제는 되지 않았다. 학구파로 공부를 많이 하였으나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신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자유로운 인문주의자이자 평화사상의 선구자로 살았다.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적극적인 호객을 받았지만 호응하지 않아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결국 신교를 받아들인 바젤시를 떠나야 했다. 현자처럼 양쪽에 발을 걸치고 머리를 굴리며 아부하고 살았다면 호의호식하며 평안하고 대접받으며 살았을 텐데 고생을 자초한 것이다. 그 영향인지 급성위장염 출혈로 사망을 했다. 그는 우자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뛰어난 현자와 지혜자이지만 우자로 살았다. 그래서 절친한 친구의 성 ‘모어’에 착안하여 어리석다는 그리스어 ‘모리아’를 생각하며 우신예찬을 썼다.
<우신예찬>은 주인공 우신이 자기 자신을 찬양한다. 그래서 제목도 그렇게 붙였다. 그러기에 우신이다. 지극히 어리석은 신이다. 우신은 자신을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것은 우신인 내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일이겠습니까?”라며 노골적으로 자신을 ‘생명 탄생의 주역이며 삶에 쾌락을 더하는 최고의 신’이라 한다. 자화자찬의 극치를 달린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은 이같이 자신을 신격화하며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 한다. 미친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식과 일반적 이치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런 사람을 미친 자, 혹은 바보 얼간이라 한다. 우신예찬에서 이를 ‘광기’라 한다. 광기에 찬 사람은 우자이다.

우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우신예찬>에서 말하는 우자는 누구인가? 어리석은 자, 우자는 솔직하고 정직하다. 자신의 희노애락 감정을 숨김없이 나타내되 재담, 폭소, 웃음으로 표현한다. 모든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한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안다. 자연에 순응하여 자연스럽게 산다. 무지하기 때문에 아부하거나 머리를 굴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지 않는다.
반면에 현자는 머리에 든 것이 많아 기회를 엿본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재미가 없고, 기예가 없다. 감정을 이성으로 제한하여 솔직하지 않고 인간미가 없어 대리석 같다. 신처럼 완벽을 추구하여 자신에게 엄격하고 가혹하며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용서하지 않는다. 자신만이 옳다는 교만에 가득 차 친구가 없으며 심각하여 즐거움을 모른다. 놀 줄도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며 아부하고 두 마음을 가진다. 그래서 짐승이라 한다. 현자들은 누구인가? 대표적인 현자는 선생, 시인, 수사학자, 저술가, 법률가, 변증가, 철학자, 신학자, 가톨릭 사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우신예찬은 우자에 대해 칭찬하고 현자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가장 똑똑하지만 가장 어리석은 자라 한다. 두 입, 두 마음을 가진 위선자라 한다. 신학자는 많이 아는 척하지만 엉터리이고, 수도사는 수많은 교파와 자기만의 전통을 고집하고, 추기경은 재산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고, 교황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황의 자리를 지키려 한다. 돈으로 자리를 사고 칼과 독약과 온갖 폭력으로 이를 보존하려 한다. 사제들은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법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간다. 교황도 역시 예배를 통해 금전을 부지런히 모은다. 그야말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우신예찬은 어리석은 자, 곧 바보, 멍청이, 얼간이, 천치 등이라 한다.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귀신이나 악귀나 유령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장래 일을 걱정하지 않고, 생각 없이 자연의 본능에 따라 즐기며, 장난치고 노래하며,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재미와 놀이와 웃음을 선사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환영한다. 군주도 이들을 총애하고 좋아한다. 군주들이 원하는 것, 즉 재담과 웃음과 폭소와 즐거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혜를 추구하는데 열심을 내는 현자는 행복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현자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며 자신의 학식만 믿고 군주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주들이 멀리하며 싫어한다. 행복해지려면 현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의 행복은 우신이 준다.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가 근심, 걱정 없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무지 속에서 자연의 본능대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우신 덕분이다. 우신이 자기 자매와 형제들을 시켜 어리석은 자에게 행복을 준다. 자기도취, 아부, 망각, 태만, 쾌락, 경솔, 방탕은 여시종(자매)이고, 광란, 숙면은 남신(남자형제)들이다.

우신이 보낸 자매와 형제들의 활약도에 따라 우자의 행복도가 달라진다. 이런 자매, 형제들이 와서 임재하면 사람은 우자가 된다. 현자가 될 수 없다. 가령 자아도취라는 자매가 오면 사람은 자아도취에 빠진다. 자아도취는 ‘자기 자신을 잘하고 있다며 어루만지는 것’이다. 즉 자기만족이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이다.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용모, 타고난 재능, 혈통, 처지, 제도나 관습, 조국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선 자아도취가 필요하다. 지나치지 않는 적당한 자아도취는 필수다. 반면에 자기혐오는 자신을 미워하기 때문에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저자의 지적처럼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화합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겠는가. 맞는 말이다. 지나친 자아도취는 교만이요 오만이 될 수 있고 자기착각에 빠질 수 있지만 적당한 자아도취는 확실하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 않는가.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자아도취가 필요하듯 타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선 타아도취가 필요하다. 타아도취(他我陶醉)는 타인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아부’라 이름하였다. 아부는 자아도취의 여동생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주는 자아도취다. 이를 나는 ‘타아도취’라 이름한다. 타아도취에는 아부와 칭찬이 있다. 아부는 상대방이 듣기 좋도록 거짓말을 섞어 과장하여 말하는 것이고, 칭찬은 상대의 장점을 찾아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둘 다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저자는 해로운 아부가 있고 유익한 아부가 있다고 한다. 상대방을 해치고 사기치기 위해 하는 아부는 해로운 아부이고, 우신이 주는 아부는 유익한 아부라 한다. 유익한 아부는 상대방을 위한 아부다. 남 앞에서 꼬리치며 아부하는 것을 사람들이 좋게 여기지 않지만 아부는 ‘인간관계를 달콤하게 해주는 꿀이며 풍미를 더해 주는 양념’이라며 저자는 아부를 매우 긍정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부라는 이미지는 역시 좋지 않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아주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도구이자 수법이다. 여기에는 필히 과장과 거짓말이 개입된다.

저자는 행복을 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라 한다. 거짓은 속이는 것이다. 아부는 상대방을 속여 칭찬하는 것, 다시 말하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거짓말하여 칭찬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은 진실보다 거짓에 쉽게 사로잡힌다며 행복을 준다면 거짓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이런 거짓말은 흰 거짓말이다. 악의가 없고 해할 목적이 없는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은 저자의 말대로 돈이 들지 않는다. 저자는 생각이 거짓될수록 행복이 더욱 커진다며 행복하다면 거짓이든 진실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흰 거짓말로 상대를 기분 좋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즐기지 않는다. 흰 거짓말도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왜 하필이면 거짓말로 상대를 칭찬하여 즐겁게 하려는가? 거짓으로 아부하는 대신 있는 것으로 칭찬해 주면 될 것 아닌가. 가령 얼굴이 전혀 예쁘지 않는데 참 예쁘다며 아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손이 예쁘면 얼굴 대신 예쁜 손에 대해 칭찬해 주면 된다. 있는 것으로 얼마든지 칭찬할 수 있는데 굳이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흰 거짓말도 자꾸하면 진짜 거짓말이 된다. 거짓에 익숙해져 진짜 거짓말을 하게 된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 그런 습관은 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나는 우자에 대해 저자의 논리를 상당히 공감하지만 거짓말로 아부하여 행복을 주자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칭찬하되 있는 것으로 칭찬하자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이 책 읽기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신나는 점은 저자 에라스무스가 기독교인들을 칭찬했다는 점이다. 에라스무스는 인문학자이자 신학자요 가톨릭 사제였기에 사제와 수도사, 교황의 위선을 비판하였지만 기독교를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아주 높게 평가한다. 사실 우신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신처럼 자기도취, 아부, 망각, 특히 태만, 쾌락, 경솔, 방탕, 광란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특히 거짓을 권장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신처럼 행복을 주시는 신이다. 하나님이 행복을 주어도 우신과는 다른 방법으로 주신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우자와 성경이 말하는 우자는 다르다.
전자는 단순하고 무지하면서 우신이 주는 자기도취, 아부, 망각, 태만, 쾌락, 경솔, 방탕, 광란, 숙면 등 본능에 의해 행복해진다. 그러나 후자는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가진다. 무지하고 어리석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무엇에 의해 행복해지는가에는 차이가 있다. 그 점을 저자가 인정한다. 그리고 진짜 우자라 한다.
저자 에라스무스는 기독교는 어리석음과 가장 가까운 종교라 한다. 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우자가 무지하고 본능적으로 비이성적, 비합리적인 삶을 미친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기독교도 그럴 것이다. 기독교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실존하지 않는 허구의 하나님이라는 신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충성 헌신하며, 비이성적,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신화 같고 소설 같은 성경을 믿고, 인간에 지나지 않는 예수를 구세주라 떠받들며 미친 듯이 봉사하고 헌신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정의한 우신과 동일하다. 그래서 저자는 기독교를 어리석음의 종교로 정의했다.

저자가 기독교인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보는 기독교는 어리석은 자들이 모인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자가 바라본 기독교인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전 재산도 아낌없이 바치고, 부당한 대우나 모욕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속아도 참고, 친구와 원수를 가리지 않‘는 사람이다. ’쾌락을 혐오하고 수많은 금식과 철야와 눈물과 고생과 천대를 감수하고 삶을 멸시하며 죽는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다. ’영혼이 몸속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정상적인 감각은 모두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다. 저자는 기독교인을 완전히 미친 사람이라고 본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얻으려 하는 행복이 어리석음이요 광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물질을 숭배하고 육체의 쾌락을 탐닉하며 영혼은 없는 듯이 생각하는데 비해 기독교인들은 있지도 않은 허구의 신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며 최우선에 두고 육체에 관심이 없으며 돈을 돌 보듯 하고 영혼을 중요하게 여기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어리석은 자로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육체를 통해 행복을 누리는데 비해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행복을 추구하니 저자도 ”내가 판단하기에 일반 사람들보다는 기독교인들이 더 미쳤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인은 확실히 우자이다. 더욱이 사도들은 더욱 미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온갖 박해를 받고 목숨까지 바쳤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기독교인이 받을 상은 광기라 한다. 의외의 말이다. 금 면류관이라든지 100평 호화 아파트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데 영 엉뚱한 소리를 하는 듯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최고의 찬사임을 알 수 있다. 광기는 미치는 것이다. 열망하고 갈망하는 것이 광기다.
무엇에 미쳐 있는 동안은 행복하다. 맞다. 사랑에 미쳐 있는 동안 행복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쳐 있는 동안 행복하다. 저자의 진단처럼 무엇에 미친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다. 기독교인은 무엇에 미쳐 있을까? 기독교인의 광기는 무엇일까? 진정한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예수님에게 미쳐 있다. 천국의 삶을 바라보며 천국에 미쳐 있다.
’영적인 것은 육체적인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저자의 말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미쳐 있고, 천국에 미쳐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그 어떤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 행복은 기독교인만이 누릴 수 있다. 세상은 줄 수 없다. 세상의 것으로 행복을 주는 우신도 줄 수 없다. 우신의 관점에서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다. 가장 큰 우자다. .
그런 면에서 나도 우자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